각성
2017년 5월 7일 강연 내용 요약
이 작품의 제목은 <인식의 공허에서 자아의식을 바라보는 자는 누구인가?> 입니다.
인식의 공허 속에서 의식 내면으로 침잠한 후에 처음 내 안에 갇혀 있을 때는 스스로를 인식하지 못하고 어둠만을 바라보다가 내 스스로 자아의식, 내 마음을 자각하고 나서야 발견한 실체를 표현한 것입니다.
왼쪽은 자아에 완전히 갇혔을 때 외부밖에 보지 못하니까 완전히 어둠밖에 보지 못하던 나를 상징합니다.
오른쪽은 내 생각의 구조물을 발견한 순수의식, 내 스스로를 자각한 내 마음을 그렸습니다.
산속에 갇혀 있을 때는 산 전체를 바라볼 수 없듯, 내면으로 침잠할 때 잠재의식 속으로 들어가 내 본성을 아무리 찾아 헤매도 가장 먼저 보이는 건 어둠과 공허 뿐입니다.
의식의 공허 속 순수의식이 자아의식에 갇힌 상태에서는 그저 공허만을 바라볼 뿐이며, 참된 내 본체를 보지 못하고 있음에서 없음으로 끝나 버립니다. 왜냐하면 보이지 않거든요. 그러니까 많은 사람들이 그 속에서 빛을 찾지 못하고, 최후의 진일보를 이루지 못한 채, ‘아 그냥 어둠이구나, 그냥 아무것도 없는 공허구나’ 하고는 더 이상의 도전을 포기해 버립니다.
만물이 나타난 무한가능태의 공허를 발견하지 못하고, 그냥 말 그대로 없음만 발견하고 내려오는 경우입니다.
이것이 많은 구도자들이 깨달았다고 착각하는 함정이자 어둠의 단계입니다.
하지만 산 정상에서 허공을 향해 한발을 더 내디딜 때 비로소 산으로부터 떨어져 나와 산 전체를 바라볼 수 있듯이, 방금 전 그 어둡던 의식의 공허에서 끝마치고 나와 버리는 것이 아니라 거기서 한 발짝 더 나아가서 그러한 공허를 바라보는 내 스스로를 다시 바라볼 때 그 자리에는 아무것도 없는 어둠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어둠을 바라보고 있는 무수한 생각의 작용이 일어나고 있다는 자기 자신의 의식을 깨닫게 됩니다.
어둠의 공허를 인식하던 내 실체를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3차원적으로 그리고 보니까 마침내 이처럼 두뇌와 같은 모습이 되었습니다.
생각은 항상 의식의 근원에서 시작되지만 집착과 두려움, 삶에 대한 집착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라는 한계에서 막혀버리는, 삶에서 나타나서 죽음으로 막히는 유한한 의식구조를 표현한 저 그림이 바로 오늘 소개해 드린 첫 번째 작품 <자아의식의 공허에서 나를 바라보는 자는 누구인가?> 입니다.
두 번째 작품은 거기서 한 발자국 더 나아간 <스스로를 자각한 공허 속 근원>입니다.
마음의 구조와 순수의식의 분리 후 스스로를 자각한 내 의식의 빛, 나얼의 빛을 시각화한 작품입니다.
왼쪽 그림은 마음에서 정신 또는 의식에너지를 오른쪽으로 걷어내고 난 후에 남은, 마치 생명이 없는 마음의 지도 같은 형상입니다. 이 상태에서 의식을 걷어내고 보니 일정한 수로에 갇히지 않고 형상을 넘어선 밝은 빛이 보였습니다. 그 전에 마음 안에 갇혀 있을 때는 의식이 생각의 가지를 타고 계속 흘렀지만 이 지점에 다다르니까 어떤 형상도 없는 맑고 밝은 깨어있음만이 있었어요.
아까 본 멘탈 시냅스에서 의식의 빛 만을 제거했더니 어둠 속에서 내 생각의 길만이 보입니다. 나얼의 빛을 뺀 마음의 구조물이죠.
실제하는 것처럼 보이는 자아의 형상, 에고의 멘탈 시냅스를 살아 숨 쉬게 하던 근원력이 분리되면 이 마음이 어떻게 형성되는지 감정이 없어진 생각 그 자체만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방금 전에 분명히 나라는 것 같던 내 마음은 내 의식에너지의 실체를 통해서 항상 흐르던 마음의 구조물, 감정과 사고의 복합적인 구조물과 같다는 것, 평생 동안 생각해 온 것, 업과 습으로 만들어진 생각의 길, 카르마의 지도, 내 운명의 지도라는 것을 아는 명확한 앎이 자리합니다. 그런데 마음에서 빠져 나왔을 때와 달리 순수 존재의식에서 빠져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그 자리에는 텅 빈 공허가 아니라 여전히 존재의식이 남아있습니다.
그렇다면 아까 갇혀 있던 마음에서 벗어나 스스로를 자각하는 이 순수의식의 빛은 무엇일까요?
그것이 바로 애초에 나라는 인간의 형상, 지금 이 순간 내 삶의 체험을 가능하게 한 나얼의 빛, 순수생명이자 존재의식입니다.
이 순수의식은 마음과 분리된 이후에도 그 자리에 있습니다. 내 존재의 빛은 절대로 사라지지 않습니다. 불변합니다.
가장 근본적인 내 생명인 나얼의 빛에서 빠져 나와서도 보이는 내 의식의 빛. 이 빛은 마음 안에 갇혀 있을 때도 빠져 나왔을 때도 보입니다.
왜 일까요?
바로 그것이 만물과 하나이자 내 얼과 하나인 한얼의식이기 때문입니다. 내 얼은 영원히 불변하는 한얼의 빛이기 때문입니다.
내 얼이 한얼입니다.
[Original working-title before completion into Trans-Art]
'Transcendental Awareness' arises after 'Dis-identification' from my mind
'순수 의식'과 '마음'의 분리 후: 공허 속 스스로를 자각한 공허 속 근원을 시각화 한 작품
'순수 의식'과 '마음'의 분리 후: 스스로를 자각한 공허 속 근원 | ||
[Original Inspiration before elaborated into Trans-Art]
'What generated physical gravity of human experience in the first place, remains in the Consciousness of Void after the Dis-identification'
순수의식 [나얼]이 자아를 자각하고 나면 더 큰 인식이 자리합니다:
실체하는 것처럼 보이던 자아의 형상, 에고의 멘탈시냅스를 살아 숨쉬게 하던 근원력이 자아의 구조와 분리되며 나 [인]것과 내가 [아닌]것이 명확히 분리될 것입니다.
분명히 실체하는 '나' 인것 같던 마음은 나라는 의식에너지의 실체를 통해 작용하던 일종의 구조물, 감정과 사고의 복합적 알고리즘, 업과 습으로 형성되어 고정된 뉴런시냅스이자 카르마의 지도 같은 것이라는 아는 명확한 앎이 자리합니다.
그렇다면 마음의 구조를 알아차릴 수 있는 순수의식의 빛은 무엇일까요?
그것이 바로 애초에 인간의 형상, 삶의 체험을 가능하게 한 순수생명이자 존재의식입니다.
순수의식과 마음이 분리된 후에도 순수의식은 거기에 자리합니다.
하지만 순수의식에서 더 나아가 그 순수의식을 보고 알아차릴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이 바로 나얼과 한'아' 인 한얼의식입니다.
+ 순수의식(나얼)은 자아의식(에고)에서 빠져 나와야만 자아의식을 바라볼 수 있지만 애초의 순수의식이 생성될 수 있는 바탕인 한얼의식은 나얼의식 안에서도 스스로를 자각하며 바라볼 수 있습니다. 나얼이 한얼이기 때문입니다.
작품 디스플레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