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차 미각미술 전시회 에르미타쥬전의 시연 전시 모습입니다.
1-1 Tasting Sweet Blossom [입안에 핀 달콤한 꽃밭] 프로모션용 스페셜 리미티드 에디션
1-2 Flowering in your mouth [입안에 핀 꽃]
1-3 Taste of Flowering [피어난 꽃의 맛]
1-4 Blossom in your Tongue [혀 위에 만개한 꽃밭]
형상 너머에 대하여: 미각미술 '더 초'가 형상과 형상 너머를 잇는 다리가 되다.
The Cho proto type 1-2
"미술의 본질은 무엇인가?
불변의 진리, 참된 사랑, 자연의 섭리, 모든 본질적인 것은 형상 너머에 있다.
자연의 이치를 성찰해 보자.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창밖에는 눈이 오고 있다.
눈을 보고 나는 완연한 겨울임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조금 더 깊이 성찰해보면 무언가 본질적인 의문이 떠오른다.
겨울의 본질은 무엇인가?
일반적으로 떠오르는 겨울의 형상과 현상, 눈, 얼음 등은 겨울의 본질이 아니다.
겨울의 표현이다.
눈 없이도 겨울은 있다.
겨울의 본질은 형상이 없다.
하지만 그 실체로 인해 겨울로 표현되는 수 많은 형상을 나툰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자연의 이치와 섭리 다 마찬가지이다.
형상은 마음의 형상도 포함한다.
생각하는 마음의 형상 너머에는 우리의 본성이 자리한다.
참사랑이 가능한 이유다.
참사랑은 이유가 없다.
부모님을 향한 무조건적인 사랑을 떠올려보라.
굳이 열거한다면 얼마든지 부모님을 사랑하는 이유를 만들어 낼 수 있고
자기 자식을 사랑하는 이유를 분석하거나 생각해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부모님을, 부모님이 자식을 사랑하는 참된 이유는 내 생각이 분석해낸 이유, 그것들 때문이 아니다.
참 사랑은 이유도 조건도 없다.
아름다움도 마찬가지이다.
왜 우리는 아름다움을 보고 감동하는 걸까?
감동적인 그림, 경이로운 자연의 풍광, 마음을 울리는 참된 사랑을 목격할 때 어떤 이유로 우리는 감동할 수 있는 걸까?"
이 질문을 깊이 성찰해 본다면 아름다움은 궁극에 가서는 이유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아름다움을 아는 것은 형상 너머의 우리의 본성이고 아름다움은 우리의 본성을 깨운다.
궁극의 본질에는 이유나 설명이 필요 없다.
미술의 본질도 종국에 가서는 사랑과 진리의 본질과 다르지 않다고 느껴진다.
참사랑은 조건이나 이유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미술도, 사랑도, 진리도, 궁극에 이르러서는 상대적 관념과 생각 너머의 우리의 본성을 깨우고 우리를 형상 너머의 본질로 인도해준다.
설명도 이유도 필요 없는 존재의 경이로움과 아름다움 그 곳으로.
불의의 사고를 겪은 작가는 치유하는 과정에서 생명을 위한 식생활과 건강 회복을 위한 절박한 미각 체험을 통해 예전과는 전혀 다른 맛의 본질을 깊이 인식하고 성찰하는 계기가 되었고, 재발견한 맛의 다차원적 측면을 그림으로 표현하기 위해 수도 없이 시도했으나 아무리 해도 만족하지 못하고 실패했다고 한다.
“제가 표현하려던 맛의 다차원적인 측면, 적멸의 순간에 느낀 형상 너머의 맛, 나의 에고를 넘어선 몰아의 순간에 발견한 순수의식으로 느끼는 맛, 그 존재적 본질의 극의를 그림으로 표현하기란 불가능해 보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저는 맛을 미술로 표현하기 위해 가장 완벽한 방법은 맛을 보여주는 방법 밖에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형상을 초월하는 트랜스아트의 의미가 무색하게 형상에만 얽매여 있던 제 의식이 해답을 각성한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맛을 그림으로 표현하는 대신 직접 맛을 보여주기로 결심했고,
이것이야 말로 제가 시도한 형식을 초월하는 트랜스아트의 본질과 일맥상통한다는 것을 자각했습니다.”
“트랜스아트는 형식을 초월해 형상 너머의 본질을 표현하는 미술이며 은유적인 표현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본질적 접근입니다.”
그는 오히려 맛이라는 솔직한 매개체를 통해 트랜스아트에 재미(FUN)라는 요소가 스며들어
명쾌하게 작가가 원하던 궁극의 맛을 미술로 표현할 수 있었으며
일상에서 자각하지 못하는 일기일회의 진리를 말해줄 수 있는 미술,
이보다 더 트랜스아트적일 수 없는 미술을 창안할 수 있었다고 한다.
"제게는 큰 의미를 가진 아트 디바이스 ‘더 초’를 사용해 깨달음과 무아의 경지가 꼭 고행을 동반해야 할 필요는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준 궁극의 미각 체험을 소개해 드리며 맛의 견성을 직접 체현시켜드리고 싶습니다.
마음을 벗어날 때 생각이 잦아드는 고요한 평화 속 적멸의 순간,
완전한 몰입 속에 무아의 경지,
내 본래의 존재상태에서 깨닫는 견성,
마음이 멈출 때 드러나는 내 본성,
생각에서 벗어날 때 느낄 수 있는 무한성과 지금 이 순간에 내재된 아름다움,
이 모두 본질을 찾는 순간을 말하는 것입니다.
많은 예술가들이 표현하기 위해 추구하던 것은 그 순간이 아닐까요?
미각체험으로 무아의 경지를 달성할 수 있을까요?
글쎄요.
아무리 강렬한 체험이라도 한 순간의 깨달음으로 의식의 구조가 환골탈태 할 수는 없겠으나
맛의 체험으로 적멸의 순간을 통해 내 본성을 잠시나마 엿보는 '견성의 체험'은 가능할 수 있습니다.
혹시 여러분도 영혼이 지쳐 힘을 잃고 지쳐있을 때 어머님이 차려 주신 밥상의 따끈한 국물이
여러분의 지친 마음을 녹이고 얼을 울린 경험을 한 적이 있나요?
번잡한 생각이 사라지고 맛있고 충만한 본질적인 느낌 속에
형언할 수 없는 진솔한 무언가가 마음의 자리를 대신하는 적멸의 순간.
이미 여러분은 수도 없이 그러한 경험을 했을 수도 있습니다.
다만 끊임없이 생각하는 마음에 의해 그 순간의 경이로움이 찰나에 감춰졌을지언정 말입니다.
우리가 자주 사용하는 ‘맛을 본다’는 말의 어원에는 이미 많은 의미가 함축되어 있습니다.
시각뿐 아니라 미각 또한 마음 너머의 근원적 감각으로 통하는 문을 열어 줄 수 있습니다.
삶의 모든 순간이 사실은 일생에 단 한번뿐이라는 사실을 절실히 자각한
몰입된 의식의 상태에서 순수한 마음으로 전념을 다해 지금 이 순간을 경험한다면 말입니다.”
The Cho proto type 3-2
‘맛보다’ Tasting is Seeing
맛을 본다는 표현에는 이미 미각과 시각이 합쳐져 있습니다.
왜 작가는 보는 것이 아닌 먹는 것을 미술이라 표현할까요?
"미 美와 미 味가 합쳐졌을 뿐 제가 표현하는 본질과 표현하는 방식은 같기 때문입니다.”
작가에게 미술은 본질에 가 닿는 매개체이자 문이고 열쇠이며 '더 초'는 작가의 이데아를 칠하는 붓입니다.
작가는 맛이라는 색감을 사용해 작가가 느낀 본질적 미-(미술의 미와 미각의 미)-실존적 아름다움과 존재의 기쁨, 삶의 본질적 요소들을 미각미술을 통해 관객들의 마음이라는 캔바스에 표현합니다.
그렇기에 관객은 그저 관객이 아니며 오직 그들만이 마음의 캔바스를 통해 트랜스 아티스트와 하나되어 작품을 함께 완성하는 동일한 트랜스 아티스트인 것입니다.
TRANS-PERCEPTION BY TASTING 이번에 작가가 사용하는 붓은 '더 초'이며 캔바스는 관객의 마음이다.
자연이 펼쳐놓은 같은 하늘도 그를 인식한 각자의 의식의 차원에 따라 달라지며 고호와 모네처럼 숙련된 표현의 달인에 의해 각자 자신만이 표현할 수 있는 경이로움이 각자 그들만의 방식으로 다르게 채색될 수 있듯이 작가는 그만의 붓과 그만의 스타일을 사용해 존재를 표현합니다. 이번에 그가 사용하는 붓은 '더 초’입니다.
작가는 자신이 직접 '더 초'를 사용해 느낀 최고의 맛을 관객이 감상할 수 있도록 제공한다.
관객은 '더 초'를 제공받아 식당에 방문해 평양냉면에 타서 즐기면 된다.
단 '더 초':일기일회는 일생 동안 단 한번의 경험이며 '더 초'를 받는 순간부터가 작지만 큰 하나의 여정이 된다: 바로 순수의식으로 여행이기 때문이다.
이북식 차가운 메밀면요리: '남한의 평양식 냉면은 고기육수의 슴슴한 풍취와 또 다른 한편으로는 직선적인 감칠맛이 메밀의 풍미와 조화롭게 어우러지는 한국 면식 식도락의 진수인 동시에 미식적으로 아주 미묘한 음식으로 유명하다.'
1, 비강미 (비강의 맛) - 혀로만 느끼는 맛이 아닌 씹을수록 비강으로 은은히 퍼지는 메밀향의 부케를 즐길 수 있는 미식의 묘미
2, 고정관념타파가 필요한 음식 - 일반적으로 대중화된 자극적인 냉면 맛에 길들여진 사람은 처음 전통평양냉면을 접할 때 이질적일 만큼 직선적인 풍미의 육수에 거부감이 들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 번의 시도가 기존 냉면에 대한 고정관념과 선입견을 너머 깊은 육수의 감칠맛과 메밀 향의 어우러짐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때 그 진미를 더욱 깊이 느낄 수 있다고들 한다.
* 하지만 더'초'를 사용해 전통평양냉면을 시식할 때는 오히려 평양냉면 메니아들이 기존 평양냉면에 대한 고정관념을 재파괴해야 새로운 식도락의 묘미를 즐길 수 있다.
+ 제일 중요한 것은 기존의 평양냉면의 맛을 재경험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일기일회의 체험을 통해 마음으로부터 벗어난 각성의식으로 새로운 미각체험을 한다는 것.
이 세상에는 수많은 다양하고도 화려한 맛이 있지만 초와 평양냉면이 결합한 맛은 작가가 아는 최고의 맛이라 한다.
"내가 아는 최고의 것을 대접해 드린다"는 것이 관객을 대하는 작가의 마음.
자신이 경험한, 최고의 맛을 느꼈을 때 적멸과 몰아의 묘미를 그대로 대접한다는 것이 미각미술 일기일회를 소개하는 작가의 자세라고 한다.
(비록 초라하거나 송구스러울지언정) 계산하는 마음 없이 내가 아는 최고의 것을 대접하는 것이 도리라는 자세는 다도철학에서 가르치는 선의 핵심 본질과 같다.
"저는 전통평양냉면이 한국전통 면식 식도락의 진수이자 그 자체로 하나의 작품이라고 봅니다.
정직하게 뽑은 메밀면과 어우러지는 차가운 고기육수, 만드는 방식과 때에 따라선 맑고 쾌청한 동치미의 발효 숙성된 맛까지 섞여져 그야 말로 단순해 보이지만 접할수록 심오한 면식의 진수입니다.
물론 수많은 값비싼 재료와 화려한 맛에 비하면 초라할 수 있으며, 다채로운 요리와 술의 마리아쥬로 장시간에 걸쳐 즐기는 정찬에 비하면 지극히 소박하겠지만 한 그릇의 면요리에 온 정성과 기술을 담아내는 기품은 일기일회라는 미술의 핵심과 그 본질을 같이 한다고 봅니다.
특히 예술식초와 만나면 기존의 전통적인 맛에 대한 고정관념마저 초월하는 발효미식의 극치로 재 탄생하는 전통평양냉면의 맛은, 제게는 그야말로 전 세계 어떤 면요리와도 바꿀 수 없는 면식 식도락의 정점입니다."
작가는 건강의 회복을 위해 습관과 집착을 완전히 내려 놓아야만 했다. 지금까지도 술 담배는 물론 해산물과 대부분의 육식도 하지 않고 있으나 유일하게 포기하지 않는 단 하나의 요리가 고기육수를 사용한 전통평양냉면이다.
식도락과 삶은 곧 하나라 믿었던 작가가 육체의 회생을 위해 극도로 절제된 식생활을 선택하면서도 놓지 않은 단 하나의 메뉴, 작가에게 유일하게 남은 최후의 미각적 호사이며 사치는 전통평양냉면이다.
일반적으로 전통평양냉면은 어떤 것도 첨가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순수고유의 맛을 즐기는 것을 최고로 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양냉면을 선택한 이유는 무엇보다 가장 맛있었기 때문이다.
단 한 그릇에 모든 것을 담아 맛의 핵심을 표현하는 일기일회의 본질적 동일성 외에도 '더 초'와 결합했을 때 마법을 부린 듯 새로운 풍미로 재탄생 하는 신비한 맛의 정수인 평양냉면 만이 미각미술의 정수를 표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작가는 수많은 음식과 '더 초'를 결합해보고 요리해 보고 경험해 봤으나 오로지 전통평양냉면과 결합했을 때 그 맛의 절정을 느꼈다.
하지만 여기서 제일 중요한 것은 맛있다 맛없다 판단하기 이전에 ‘생각 없음’이다.
주관적인 판단과 분석은 생각하는 마음의 작용이며 생각하는 마음으로는 순수의식인 몰아의 상태 (적멸의 순간)를 맛볼 수 없다.
이 사실을 명확히 인지하고 각성된 의식으로 맛을 경험할 때 우리는 편견 없이 있는 그대로 순수의식으로 맛을 체험할 수 있다.
일기일회의 의미를 의식하지 않더라도 맛을 보는 순간, 생각이 일어나기 이전에 감각이 마음을 대체하는 순수의식의 순간은 누구에게나 있다.
하지만 이러한 의식의 작용을 명확히 인지하고 있지 않은 이상 그 순간의 찰나는 의식되지 못한 채 마치 없었던 일인 양 사라져 버릴 것이다.
이러한 의식의 작용과 일기일회의 의미를 명확히 각성한 후에야 비로소 관객은 참된 ‘생각 없음- 몰아의 경지와 적멸의 순간'을 통해 생각에 지배 받지 않고 깨어있는 순수의식인 내 본성을 일시나마 체험하는 ‘견성’이 가능하다.
평양냉면 애호가들을 포함한 '더 초'를 경험하시는 모든 님들께서도 평양냉면은 이래야 한다는 선입감과 개인적 기호를 잠시 비워 놓고 처음 평양냉면을 모르던 순수의식으로 돌아가 ‘더 초 (미각아트)’를 경험해 보신다면 이전과는 전혀 다른 맛의 체험과 생각 너머의 그 무엇인가를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맛있다 없다, 좋다 싫다의 상대적 개념을 초월한다.
이 경험은 오로지 일기일회, 평생에 한번이라는 사실에 트랜스아트의 정수가 있다.
우리에게 주어진 단 하나의 시간이자 공간, 영원한 지금 그 한 순간으로 작가는 우리를 몰아넣고 전념하게 한다.
이 전시회의 핵심은 냉면도 아니고 식초도 먹는 행위도 아니다.
이들은 작가의 의도를 가리키는 손가락일 뿐, 본질은 그 너머에 있다.
작가는 형상 너머의 본체를 가리킨다.
우리가 일기일회의 의미를 자각하고 한 그릇의 냉면을 위한 여정을 떠날 때 한 그릇의 냉면을 비우고 난 후 무엇을 느낄 것인가?
손가락을 볼 것인가, 손가락이 가리키는 형상 없음 속에서 진짜 우리 자신을 찾을 것인가?
맛의 있고 없음을 넘어서보시길 바란다.
어차피 일생에 단 한번이니까.
좋아도 싫어도 다시는 경험할 수 없으며 사고 싶어도 살 수 없다.
대통령도 노숙자도, 재벌도 걸인도, 아이도 어른도 단 한번의 기회만이 있을 뿐이다.
우리의 삶처럼.
그 일기일회에 집중했을 때 무엇이 느껴지는지 체험해보라.
맛있다는 생각 너머의 초월적 맛을 경험해보시길 바란다.
추천 평양냉면 명가:
을지로 우래옥 본점
강남 우래옥 직영점
평양면옥 논현점
을지면옥
논현동 한우리 본점
그 외에도 수 많은 훌륭한 냉면 명가들이 전국에 산재하지만 위의 식당들은 ‘더 초’와 결합되어 재탄생할 때 그 상생작용이 더 특별하고 아주 오랜 기간 경험해본 바 대부분 가장 일관적인 퀄리티를 유지한다.
작가가 가장 선호하는 곳은 우래옥 본점의 민짜 순면(단골들의 메뉴로 메뉴판에는 없지만 주문 가능한 고기 없이 100프로 메밀면)이다. 한우리는 가장 메밀향이 강해 선명한 비강미를 선사하며 을지면옥은 전체적 느낌이 마치 오래 전 시간 너머로 타임슬립 한 듯한 풍미의 여운이 깊다. 평양면옥은 논현점이 전체적으로 가장 일관적이며 높은 수준의 명품 냉면을 선보인다.
+ 위의 평양냉면 명가들은 길게는 70년 이상의 세월을 보존해온 무형의 식문화재급 명가들로 평양냉면 맛의 장인들이 만들어 내는 하나의 훌륭한 미식 작품들을 내는 곳이며 역시 명인이 만들어 낸 ‘더 초’와 합쳐질 때 전혀 새로운 작품으로 다시 태어난다.
“본질적인 측면에서 삶을 뒤돌아볼 때 한쪽이 좀 더 빨리 없어진다는 사실 외에, 영혼을 울리는 한 그릇의 음식과 영혼을 울리는 한 폭의 명화가 체험자에게 다른 점이 무엇인가?"
"더 초: 일기일회 평양냉면편을 관람하는 방법은 간단합니다.
'더 초(아트식초)'를 정통 평양냉면에 타서 드시면 됩니다.
전시장은 냉면집이고 관람료는 냉면값이 다입니다.
'더 초'는 무상으로 제공됩니다.
미술을 어떻게 이해할지 감상할지 어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미술을 먹는 것보다 어떻게 더 직접적으로 느끼고 알 수 있으며
더 어떻게 명쾌하게 이해하고 감상할 수 있겠습니까?”
작가는 관객에게 '더 초'를 체험할 수 있는 단 한번의 기회를 무상으로 제공한다.
관람객은 '더 초'를 받은 후 각자 희망하는 전통 평양냉면집에 가서 냉면에 풀어 즐기면 된다.
단 이 관람은 일생에 단 한번의 경험임을 명확히 각성하고 몰입하여
생각하고 분석하는 마음을 내려놓고 모든 과정을 하나의 여정으로 전념을 다해 즐긴다.
'더 초'가 형상과 형상 너머를 잇는 다리가 되다
The Cho proto type 1-2
본질적인 측면에서 미각미술에 관한 모든 설명은 작가가 표현하려는, 관객이 체험했으면 하는 무언가를 가리키는 손가락이다.
그리고 그 손가락이 무엇을 가리키고 있는가는 그저 시원하게 냉면 한 그릇을 비울 때쯤이면 이미 알게 될 것이다.
그래 봤자 냉면 한 그릇 아닌가.
하지만 생각하고 판단하는 마음을 내려놓을 수 있다면
고작 냉면 한 그릇에서 시작도 끝도 없는 지금 이 순간 속에 감춰진 영원불변의 묘미를 발견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한 그릇의 음식에 무엇이 담기느냐에 따라 영혼을 감동시키는 맛을 경험할 수도 있다.
바로 그러한 때에 항상 변화하며 요동하는 표면의식 저변의 깊은 곳에서
순수하고 맑으며 명확하고 진실된 무엇인가가 드러난다.
맛의 견성.
맛을 통해 적멸과 몰아의 순간에 나타나는 본성을 발견할 수 있을까?
쉽지는 않지만 잠시 엿볼 수는 있을 것이다.
본성은 찾아 헤매어서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눈이 눈을 찾아 헤맨다고 볼 수 없듯이.
생각하는 마음으로부터 놓여나면 그 자리에 남아있는 것이 바로 본성이다.
죄송스러운 이야기지만 ‘더 초’ 를 경험할 수 있는 기회는 단 한번이다.
일기일회의 의미를 자각하고 몰입한 순간,
전념을 다해 맛보는 냉면 한 그릇의 명쾌함 속 찰나에 여러분의 본성이 잠시 미소 지을지도 모른다.
The Cho proto type 1-3
맛은 주관적이며 한 사람에게 최고의 맛이 다른 이에게 최악의 맛이 될 수도 있다.
게다가 평양냉면은 그 진미를 느끼기 위한 진입장벽도 높고 굳건한 메니아 층이 형성되어
아무것도 첨가하지 않은 순수냉면의 맛을 최고로 치기에 논란의 가능성 또한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가 굳이 평양냉면을 화두로 제시하는 이유는
실제로 평양냉면이 ‘더 초’와 만났을 때 놀라울 정도로 변신하는 상생작용은 작가가 경험한 최고의 맛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작가는 복잡한 계산이나 생각하는 마음 없이 그저 자신이 아는 최고를 소개하고 싶었다고 한다.
오로지 경험할 수밖에 없다.
그것도 일생에 단 한번만: 마치 우리의 삶처럼
여기서 제공되는 아트 식초는 이 기획전시를 위해 평양냉면용으로 특별제작 한정 생산된 전통 수제 식초이다.
모든 관람객에게 단 1회만 무상으로 제공되며 구입할 수 없다.
'더 초'는 오로지 웹사이트에서 신청하는 분에게 무상으로 제공되며 초를 제공받기 위해서는 진심으로 전시에 참여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여기서 평양냉면의 맛은 맛을 통해 우리가 진심으로 맛보려 하는 적멸과 몰아를 가리키는 손가락이다.
맛이 좋다 싫다는 생각하는 마음이며 판단이다.
'더 초'가 가리키는 본질은 '생각 없는 깨어있는 의식'이다.
좋다 싫다(생각하는 마음)이 없어 질 때 본성(몰아, 무아)인 맑고 밝은 의식이 드러난다.
우리는 아름다움에 대해 생각하고 분석할 수 있겠지만 그것은 생각하는 마음의 작용이며 다차원적 본질의 지극한 일부에 불과하다.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수 천년 간 이어져온 사고하는 방식 (에고 의식으로서 인간 마음의 운용체제/집단 의식의 멘탈 알고리즘)에 길들여져
제한된 의식수준과 생각작용방식에 의해 스스로는 자각하지 못하는 에고의 한계를 가지고
끊임없이 생각하는 마음의 부작용에 대해 단 한치의 의심도 없이 마음운용프로그램의 작용이 자신이라고 믿고 동일시 해왔다.
그렇게 자신의 본성인 순수의식이 갖는 초월적 자각력과 무한성은 표현되지 않은 채 내재되어 휴면상태로 살아왔다.
하지만 인간은 가끔 마음을 넘어설 때가 있다.
진정한 사랑을 경험할 때,
생각하고 분석하는 마음을 초월한 아름다움을 경험할 때,
무언가에 완전히 몰입하여 전념을 다할 때, 또는 영혼을 울리는 맛을 보았을 때,
그리고 불굴의 의지로 생각하는 마음을 뚫고 의식의 해방을 이룩했을 때,
일상에서 반복적으로 사용하던 두뇌의 뉴런시냅스 너머서의 의식에너지가 활성화된다.
그러한 순간을 마음이 사라지는 몰아의 순간, 생각하는 마음 너머 작용하는 적멸의 순간,
에고를 넘어서는 의식활동이 가능한 무아의 경지라고도 한다.
본질적인 것은 생각 너머에서 이뤄진다.
만물의 다차원적인 본질은 그 일부의 형상에 이름 붙이고 이해했다고 넘어간다고 진짜로 알게 되는 것이 아니다.
이번 미각의 미술 또한 체험자가 생각하는 마음에 기대어 판단하고 이해하려 하고 분석하려 할 때 핵심을 놓칠 수밖에 없다.
그것은 다시 마음에 갇히는 것이다.
생각 너머로 가는 길은 생각으론 본질을 알 수 없다는 사실을 명확히 자각하고 인정한 후
순수한 의식, 몰입된 의식으로 냉면을 맛보는 것에 전념을 다하는 것이다.
단 한번의 기회에 전념을 다하여 각성된 의식으로 삶의 한 순간을 경험하고
소박한 맛에 담긴 현존의 미각을 통해 형상 너머의 의식차원을 경험하는 것.
그것이 일기일회의 정수다.
여러분과 내가 동시에 본질 창조자이자 본성 자각자로서 하나되는 것이다.
그것이 간단하지만 심오한 ‘더 초’미술의 핵심이다.
여기서 트랜스 아티스트는 작가뿐만이 아니다.
이 미술 전시회는 참여자가 아티스트가 되어 미술을 체험하고 완성하는 기존 미술의 방식을 초월하는 미술이다.
일기일회의 체험을 통해 이미 여러분이 가지고 있던 것과 이미 여러분이 알고 있었던 사실을 재발견한다.